[新 문화지리지 2009 부산 재발견] <16> 부산의 근대를 걷다 - K씨의 1939년 기행기
부산역 거리는 유럽의 왕궁같은 르네상스식 건물 즐비…미나카이 백화점도 신식 공산품 가득2009-09-03 [15:47:00] | 수정시간: 2009-09-08 [16:23:43] | 31면
7천t급 관부연락선 '곤고마루'(金剛丸)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렸다. 일본 시모노세키를 출발한 지 불과 7시간 만이었다. 간혹 조선 사람들도 보였지만 기모노 차림에 양산까지 들고 한껏 멋을 부린 일본 여성을 비롯해 일본인이 훨씬 많았다. 제1잔교에 내린 사람들과 함께 상옥(上屋)을 따라가자 바로 부산역이었다. 제1잔교가 개통되면서 부두와 철로가 바로 연결됐는데, 일본서 바로 중국 봉천까지 이어지는 셈이었다.

부산역을 빠져나온 K씨는 이곳이 1939년 부산인지, 아니면 서양의 어느 거리인지 헷갈렸다. 서양풍의 르네상스식 건물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부산역은 원래 바다였던 곳을 메운 곳이라 땅 속 깊이까지 말뚝을 박았다고 했다. 붉은 벽돌벽에 화강암으로 세 겹의 테두리를 둘렀고, 옥상에는 시계탑과 창문을 내단 각탑이 있었다. 시간에 맞춰 운행되던 기차의 등장은 근대적 시간 관념을 조선 사람들에게도 점차 주입시켰고, 그 상징이 부산역 시계탑이었다.
부산역을 나오자 부산을 대표하는 건물들이 한 눈에 보였다. ㄱ자형의 건물로 8각 4층의 탑이 인상적인 부산세관, 흰색과 빨간색의 두드러진 대비와 함께 9각형의 드럼 위에 올린 돔이 멋진 부산우편국. 유럽의 왕궁도 이처럼 화려할까 싶었다.
부산우편국에서 장수통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골목길 높은 석축 위에 있는 건물에서 잘 차려 입은 일본 아이들이 몰려 나왔다. 부산공립유치원이다. 일본의 부잣집 자제들은 복도 많지 싶었다.
몇 걸음 더 떼자 초량왜관 시절 왜인들의 수장이 머물던 관수가 자리가 보인다. 부산부청으로도 사용됐던 건물이었는데, 바로 옆엔 부산경찰서도 있었다고 했다. 1920년 박재혁 의사의 폭탄의거가 있었던, 바로 그 현장이다.
부산 통치의 핵심기구인 부산부청은 장수통 맞은편 바닷가로 몇 년 전에 옮겼다. 한데, 부산부청보다 더 눈에 띄는 건 바로 옆 5층으로 된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엘리베이터가 2대나 설치돼 있다는 건물이다. 토성동 남선전기 사옥에 엘리베이터가 생겨 사람들에게 화제가 됐던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네모난 통 속에 들어가 버튼만 누르면 휙하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는 신기했다. 백화점 안에는 일본서 건너온 신식 공산품들이 즐비했다. 월급쟁이 한 달 월급에 맞먹는 백색구두를 신고 다니는 모던보이와 높은 뾰족구두를 신고 다니던 모던걸은 여유롭게 백화점을 활보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상화되면서 조미료 아지노모도와 카라멜 모리나가 광고에도 탱크와 군인이 등장할 정도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안하면 백화점 안은 딴 세상 같았다.
부산부청 옆에는 상판을 들었다 내리는 영도다리가 있었다. 거의 직각에 가까운 80도 정도까지 상판을 들어올렸다. 때마침 범선이 예인선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다. 다리를 드는 15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배를 통과시키기 위한 방편이라 했다.
영도다리를 실컷 구경하고 난 뒤 장수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물, 부산저금관리소다. 부산상품진열관으로 지은 건물인데, 2층에 닿을 정도로 높은 아치형 입구하며 양쪽에 세워진 3층 높이의 뾰족한 원뿔형 지붕이 멀리서도 이국적인 정취를 뿜어내기에 충분했다.
온갖 상점이 몰린 장수통은 일본인들 천지였다. 우리나라 첫 공설시장인 부평정공설시장도 마찬가지였다. 1939년 현재 조선에 사는 일본인은 총인구의 2.9%에 불과했지만, 부산에는 총인구 22만2천690명 가운데 5만1천802명이 일본인이라 했다. 넷 중 한 명은 일본인이었던 거다.
대청정 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처음 만난 건물이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다. 바로 옆 조선은행 한국지점과 함께 대표적인 식민지 경제침탈의 근거지였다. 민간인들에게도 악명이 자자했던 부산헌병대는 동척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동대신동에 있던 부산형무소와 함께 조선인들에겐 악몽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동척 부산지점 옆길로 해서 용두산공원에 올랐다. 조선에서 가장 높은 일장기 게양대가 있던 곳이라고 했다. '도리'(ㅠ자 형태의 문)를 지나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용두산 신사가 나타났다. 손 모아 두 번 절하고 손뼉을 치는 일본인들이 제법 보였다. 용두산뿐만 아니라 일본 3대 명승지인 마츠시마(松島)를 빼닮은 풍광으로 만든 송도해수욕장이나, 천황의 연호를 딴 대정공원 같은 위락시설도 철저히 일본식으로 계산된 공간이었다.
용두산에서 내려와 영선고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붓을 살 일이 있어 청관거리로 갈 작정인데, 영선고개가 지름길이었다. 착평공사(1909~1912)로 헐려 없어진 영선산을 가로 지르는 고개였다. 초량왜관 시절 참수형은 영선고개 숲에서 시행했기 때문에 혼자서는 대낮에도 고개를 넘기엔 소름끼쳤다고 했다. 영주정에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영도다리건설 희생자 위령탑이 보였다. 다리 공사를 하다 숨진 넋들을 위해 잠시 고개를 숙여 조의를 표했다.
영선고개에서 내려 조선상업은행 부산지점을 지나면 청관거리로 이어진다. 청관거리는 온통 붉은 색의 홍등이 내걸린 이색적인 거리였다. 괜찮은 먹이며 벼루 같은 문방구류는 청관거리에서 대부분 구해다 썼다.
청관거리에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봉래각이다. 5층 벽돌건물인데, 부산에 이만큼 높은 건물이 없었기에 구경하러 온 인파도 만만찮다고 했다. 지금이야 기생과 한량들로 북적거리는 중화요리집으로 변했지만, 한때 이곳은 부산서도 이름난 종합병원이었다. 독일 일본 의료진까지 초빙하고 병상 수도 40개가 넘었는데, 원장이었던 최용해가 행려병자의 사체로 해골표본을 만들어 보관하다 항간의 비난을 못 견뎌 야반도주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영주정에 있던 기생조합인 봉래권번의 기생들도 봉래각 단골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봉래권번이 요즘 들어 잘나간다고 했다. 현재 조합원 수가 70명을 웃돈다고 했다. 친절(?)하게도 부산관광협회에서 펴낸 부산안내 책자에는 기생들의 화대가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었다.
봉래각 바로 옆에는 명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명태고방으로 불리던 남선창고다. 초량객주 사람들이 원산에서 온 명태며 수산물을 부려 삼남지방 일대에까지 공급하던 물류창고였다.
문득 시계를 보니 오후 5시가 넘었다. 경남도청 앞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랴부랴 초량입구에서 전차에 올라탔다. 처음 전차가 다닐 때만 해도 '번갯불 잡아먹고 그 힘으로 달리는 괴물'이라고 놀라워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신비함은 많이 사라졌다. 부산도 근대의 세례를 시나브로 맞고 있는 중이었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