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 화면만 터치하면 알아서 매끈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스마트폰을 누구나 가지고 다니지만, 그래도 사진을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전문가용 카메라를 잘 다루는 것, 그리고 근사한 작품사진을 찍는 기술을 배우는 것 정도로 대답을 한다.
카메라가 장롱 속에 보관하는 귀중품으로 취급받으며 한 달치 월급 정도는 지불해야 쓸만한 카메라를 살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이 아니더라도 부담 없는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쓸만한 카메라들이 많고, 중고시장에는 더 좋은 가격의 카메라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많은 기능들이 자동화되어 그냥 셔터만 눌러도 정확하게 사진을 찍어내는 카메라들이 대부분이다.
즉, 사진이라는 취미의 문턱이 낮아져 동호회를 시작으로 사진인구가 크게 확대되었지만 본격적인 예술로서 사진에 도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예전에는 대학에서 전공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었지만 최근 들어 사진작가들이 진행하는 수업을 중심으로 비전공자들이 심도 깊은 사진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동구에서는 오래전부터 흑백암실작업을 배울 수 있었던 초량동의 아트뱅크가 있었고, 2017년 드디어 수정아파트 4호동에 윤창수 작가가 갤러리 수정을 열면서 사진아카데미 과정도 함께 시작되었다.
교육과정은 기초반과 중급반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카메라의 이해부터 시작하여 유명 작가들의 사진세계를 통해 사진사의 흐름을 짚어보며 자신의 사진이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를 한다.
각 과정의 마무리 단계에서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은 수업을 위해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단체전을 준비할 수 있으며 현재 2020년 졸업 전은 아래와 같이 전시되고 있다.
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사진세계를 넓혀보고자 한다면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여 문을 두드리면 된다.
'문화공감 수정'이 '정란각'이라는 이름의 요정으로 영업을 했던 시절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문까지 올라가서 입구 앞의 공간을 보면 계단 쪽이 좁고 반대편이 넓은 부자연스러운 모습인데, 대문을 바라볼 때 왼편의 빌라는 원래 정란각의 정원이 있던 자리였다. 정원을 없에고 그 자리에 빌라를 지으면서 빌라 쪽으로 나있던 계단을 헐고 지금의 위치에 새로 계단을 만들었다.
중앙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하굣길에 일본인들이 전세버스를 타고 와서 단체로 정란각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기억난다.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동네아이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늘 궁금했었다. 한 번은 호기심에 큰 마음을 먹고 대문 틈으로 엿보았던 적이 있었는데 때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국악공연을 하고 있었고 호텔 종업원 복장을 한 남자 직원들이 분주히 서빙을 하던 광경이 보였다.
정원에는 커다란 석류나무들이 있어서 친구들과 몰래 담을 넘어가 석류서리를 했던 적도 있었다.
그 이후 요정 영업이 중단되고 장군의 아들, 범죄와의 전쟁 등의 영화 촬영장소로 쓰이다가 현재는 등록문화재 330호로 지정되어 국민문화신탁에서 문화공간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원도심 일대에 많이 남아 있던 일식가옥들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가치를 인정받아 부산의 근대사를 증언하며 지역의 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게된 것은 정말 다행이라 생각된다.
비교적 규모가 크고 잘 관리된 탓에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번 전시와 공연이 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아쉽게도 가보지 못하다가 이번에 열린 네오풍류는 챙겨서 관람하게 되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란 문화유산을 ‘국민’ 에게 ‘신탁’ 하는 것이자 국민에게 신탁받은 문화유산을 보전·관리해 미래세대에게 물려주자는 사회운동으로 자신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기증하거나 맡겨도 되고 매달 일정액의 회비를 납부하는 방법도 있습니다.(nationaltrustkorea.org/greeting/)
첫번째 순서로 민혜성명창의 숙영낭자가. 현존하는 판소리는 다섯 마당에 대한 설명과 숙영낭자가가 전승된 설명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여유로운 토요일 저녁 가볍게 찾아온 곳이라 평상복을 입고 부르는 숙영낭자전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두 번째 순서는 대금 임명희의 연주, 만파식적에 얽힌 이야기로 시작하여 다향과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연주 감상
세번째 순서는 대금, 소금 이상현의 청성자진한잎, 오버 더 레인보우,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크로스오버 공연.
마지막으로 출연진이 모두 나와서 흥겨운 진도아리랑, 마이크가 객석으로 넘어와 나도 한 소절 불렀음.
작은 규모의 공연이 두 시간쯤 진행되었지만 각 출연진의 공연 설명이 곁들여져 시간이 금방 흘러간 느낌이었으며, 지루하고 고리타분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국악을 작은 무대 앞에 앉아 몰입해서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생각보다 관객이 적어 빈자리가 좀 남아 있었는데, 부산동구청에서 운영하는 SNS를 통해 소식을 받으면 앞으로 진행될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아버지께서 외국을 자주 나가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어머니 손을 잡고 목욕탕을 다녔었다.
확실하게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이 둘 있는데, 하나는 유치원생 시절(1977년) 어느 겨울, 여탕 탈의실 옷 바구니에 같은 유치원 유니폼이었던 남색 개바지(뜨개질바지)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학교 저학년 때 민망해서 정말 가기 싫었는데 억지로 어머니 손에 끌려 손바닥으로 등짝을 맞아가며 끝내 여탕을 들어갔던 기억이다. 나름 어머니의 배려로 사람이 없는 새벽이었다지만 누군가 먼저 와 있었다.ㅠㅠ
할머니랑 셋이서 갔던 기억도 나는데 늘 새벽별이 반짝이던 이른 시간에 힘들게 일어나 쌀쌀한 바람을 헤치고 집을 나서서 동이 틀 무렵 돌아왔던 장면이 선명하다.
처음엔 단층 건물로 지어져 카운터를 중심으로 왼쪽이 남탕, 오른쪽이 여탕이었다. 목욕탕 입구에는 정원이 있었고 카운터 맞은편에 작은 화단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코브라처럼 생긴 현무암이 세워져 있었다.
탈의실에는 나무조각을 투박하게 깎아 만든 열쇠가 꽂힌 옷장이 있었는데 명절 직전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어 모자라는 옷장 대신 커다란 바구니에 옷을 담았던 풍경도 기억도 난다.
중학교 1학년때(1984년)까지 옛 모습의 목욕탕을 다녔던 기억이 있고, 이후 리모델을 하여 현재의 2층 건물이 되었다.
인터넷에는 내가 태어나기 한달쯤 전인 1971년 9월 22일 문을 열었다고 검색이 된다. 백초탕의 위치상, 그리고 영업을 시작한 시기상 1969년 준공된 수정아파트의 주민들을 겨냥하여 영업을 시작한 목욕탕이라 생각된다.
백초탕의 뜻은 흰'백'에 풀'초'라고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동안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바람에 정확한 사실인지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백초탕 옆에는 같은 이름의 백초이용원이 있었고, 몇 년 전 이발사 아저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30년 넘게 거기서 머리를 깎았다.
가장 최근 백초탕과 관련된 기억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남자들의 로망 중 하나가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을 가는 것이라는 것에 공감을 하는데, 첫째가 세 살쯤 되었을 때(2003년) 이른 아침 같이 목욕을 갔다가 아이가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집에서 원망을 들었던 사건이다.
그 이후도 좀 다니다가 오래된 목욕탕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지저분한 느낌이어서 발을 끊은지 10년이 넘었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얼마 전 생각지 못한 사건에 휘말려 다시 백초탕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오래간만에 들어갔는데 이전보다 산뜻해진 느낌이어서 그리고 마침 휴직기간이기도 해서 이달 들어서만 3번째 백초탕에서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왔다.
쌀쌀하게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면 이른 아침 한적한 목욕탕에서 뜨겁게 몸을 담그는 것이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태어난 동네에서 계속 살고 있지만 현재 다른 곳으로 이사갈 계획도 없음으로 언제까지 나와 나이가 같은 백초탕을 계속 다니게 될 지 새삼 궁금하다.